1918년 11월 19일, 김윤식 선교사는 첫 해외 의료선교사로 중국 땅을 밟았다. 김윤식 선교사의 4남 김영정 장로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 김윤식은 평양 장정현교회 출신으로 숭실학교 졸업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닐 때 세브란스병원 안에 있던 남문밖교회를 다니셨고,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교회에서 지휘를 하셨고 유학을 꿈꾸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김윤식은 유학을 내려놓고 한국교회 첫 번째 해외 의료선교사로 파송받아 사역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과 삶을 통해 엄청난 일을 중국 땅에서 행하셨다.
“래양 김윤식 의사의 병원은 일장월취하여 특별한 신용과 칭찬을 받는 중 일반 교파, 교육계, 상업계는 물론이요 당지 관청에까지 촉탁을 받아 일반 관리, 죄수의 치료와 위생을 담임케 됨으로 우리의 숙제이던 감옥전도 사업실시가 된 일이오며”
(1923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회록 90쪽)
그가 중국 땅을 밟은 지 5년 채 되지 않아 거둔 선교의 결실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데, 이와 같은 결실은 선교지에서 자신의 자녀를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낸 눈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거4월분에 김윤식 의사의 아들 4세 된 것이 별세하였사오며”
(1921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10회 회록 中)
“홍목사의 다섯째 아들과 김윤식 의사의 둘째 아들이 각각 본국에서 금년 별세하였사오며”
(1923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회록 中)
특히 김윤식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를 향한 큰 사랑의 섬김 “친절한 치료”를 하였고, 특히 부인 박희복 선교사는 선교사의 자녀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
“작년 10월부터 금년 1월까지 4개월 동안 방효원 목사(故 방지일 목사 부친)는 질병으로 고생하고 그 부인과 아이는 독감으로 1개월 동안 신고하였고 또 두 아이는 홍역으로 40일간 고생하였고 그 부인은 유통으로 수삭 동안 신고하는 중 세 번이나 몽혼하고 아홉곳이나 수술하였는데 4개월 동안 경야하여 고생을 많이하고 용비도 200원이 소모되어 곤난막심하게 지내였나이다. 김윤식 의사가 수고를 많이 하였사오니 총회에서 편지하여 감사한 뜻을 표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1919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8회 회록 中)
“선교사 방효원씨 부인과 박상순씨 부인이 병중에서 위태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김윤식 의사의 친절한 치료로 쾌복하였사오며”
(1920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9회 회록 中)
“선교사의 자녀들은 여전히 김윤식 의사의 부인이 학교 모양으로 교수함으로 성적이 량호하오며”
(1920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9회 회록 中)
처음에는 중국인들에게 아편장사로 오인받기까지 했고 하루에 환자도 3~4명 수준이었으나 3년이 되어서는 5~60명에 이르는 등 결국 그의 섬김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래양읍 촌간유지한 형제 수십명이 발기하여 현판 2개를 김윤식 의사에게 선사하였은데 가지고 올 때에 8인이 메고 음악을 갖추어 수십명 발기자는 뒤에서 따라오고 구경군 수백명은 행렬을 지어 따라와씅니 이것이 갑으로 말하면 수삼십원이나 유공한 인물에 하는 대우로 하였으니 참 감사하오며”
(1921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10회 회록 中)
1930년 초, 래양에서 청도로 이주하였고, 중앙의원을 개원하여 의료선교를 계속하셨다.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고, 그래서 그 지역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0년 쯤 광복군 군자금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영구출국당하여 고향(평남 평원군 숙천면 독수리)으로 돌아와서는 자택에 연금되어 더 이상 의료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1.4후퇴 때 서울로 오셨고, 부산 적기(현. 범일동) 피난민 수용소 내 천막에서 생활하셨다. 그리고 1958년 8월 7일, 위암으로 투병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별세하기 전까지의 7여 년의 행적은 장례 때의 기억들 속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1958년 8월 7일, 부산 적기에서 별세하셨는데 적기교회 한목사님의 인도로 장례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장례예배 때 사랑을 많이 받은 숭실학교 중고등학생들이 참석하여 성가를 불렀고, 숭실학교 교사들과 학생들, 특히 흑석동 성모병원 원장으로 섬기셨기에 수녀들과 병원에 관련된 외국인들이 많이 참석하여 장지까지 동행하며 추모하였다.”
(후손들이 전해 준 장례 때의 기억 중에서)
“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복락을 누리겠네”
김윤식 선교사는 평소 좋아하신 찬송 “주의 주실 화평”대로 선교지에서 의사 선교사로서, 고국에서는 의사 장로로서 “주의 주실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셨다.